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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실제사건) 본문
이번 사건은 도쿄(東京) 도시마구(豊島区) 니시스가모(西巣鴨) 에서 일어난 아동방치 사건으로, 통칭 스가모 아동방치사건(巣鴨子供置き去り事件) 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88년 7월 18일, 도쿄 도시마구 스가모의 한 맨션에서 "동거자인 엄마가 아이 3명을 놔두고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居住者の母親が子供3人を置きっぱなしにして帰宅しない) 는 내용의 제보가 경찰에 접수되어 경찰 및 아동복지사를
대동하여 해당 맨션을 방문한 결과, 제보자의 증언대로 아이 3명이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는데요.
방 안에는 잔반이 썩은 악취로 가득하고, 당시 14세의 장남, 각각 6살, 3살짜리 여동생은 장기간에 걸친 영양 실조로 인해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였고, 화장실 근처에는 대변이 말라붙어 있었고, 제대로 청소가 이루어지지도 않은 것으로 보이는 상황으로 볼 때 아이들의 방치가 상당히 오래된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에 쇠약하기는 하지만 걸을 수 있었던 장남을 제외하고 나머지 2명의 여동생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후에 뉴스를 보고 "어, 이거 혹시 우리 집 아닌가" 하고 돌아온 아이들의 어머니에 의하면 자신의 아이는 총 4명으로 장남 아래 3명의 여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도대체 1명의 여자 아이는 어디론 간 것이며, 어머니는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되도록 아이들을 방치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데요.
아이들의 어머니는 1973년, 26세에 장남을 낳았으며,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지만 이뤄지지 않은 채 남성들과의 연애에 몰두했고,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변변한 남자들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79년 장남이 6살이 되었음에도 취학통지서가 날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어머니는 물론이고 장남의 아버지까지 "구청에 한 번 가서 해결하면 된다" 는 생각만 가지고 장남을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사실, 부모 모두 구청에 장남의 출생신고는 물론이고 혼인 신고조차 하지 않은 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죠.
1981년, 두 번째 여자 아이를 자택에서 출산했으며 당연히 이 아이도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고, 여담이지만 이 여자가 낳은 아이들은 다 제각각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1984년, 세 번째 남자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데요. 여기까지만 보면 "어? 장남 1명, 여자아이 3명인데 왠 남자 아이가 하나 툭 튀어나오냐" 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차남은 3년 후 어머니가 우유를 먹이던 중 질식사하고 말았는데요. 이 죽은 차남의 처리를 곤란해 하던 어머니는 아이의 시체를 적당히 비닐 봉투에 넣어 집 안에 유기했고, 후에 백골로 변한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습니다.
이후 1985년에 한 명, 1986년에 한 명, 이렇게 죽은 아이를 제외하고 총 4명의 각각 아버지가 다른 아이를 계속 출산 했습니다.
이쯤되니 아이를 돌보는 일상에 지쳐버린 어머니는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애인과 동거할 생각하게 되고, 1987년 가을, 그 때까지 어머니가 일을 하러 나간 사이에 항상 동생을 돌보던 장남에게 갑자기 현금으로 몇 만엔 정도를 쥐어주며 자신은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당연히 아직 어렸던 장남은 울면서 가지 말라고 매달렸지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는 행복해지면 안되는 거니?"
(お母さんは幸せになっちゃいけないの?)
사실 아이를 버리고 얻는 어머니의 행복 따위 존재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그래도 장남은 막아서지 못하고 그대로 어머니의 가출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1년에 가까운 아이들만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장남은 주어진 돈을 아껴서 근처 슈퍼에서 도시락이나 삼각 김밥을 사다 먹이며 열심히 돌보지만, 일을 해서 돈을 벌 능력이 없는 장남으로서는 얼마 안되는 돈으로 꾸려가는 살림 살이가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그렇게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동네에 물건을 사러 돌아다니는 사이 3명 정도 친구가 생겼고, 취학통지서도 날아오지 않아 학교를 가지 못한 장남에게는 이 소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상당히 즐거웠던 모양입니다.
친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너 학교는 어디 다니니?" 라고 물을 때마다 어머니에게 배운대로 "릿쿄소학교(立教小学校)" 에 다닌다고 둘러댔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남은 그렇게 하루하루 괴로운 살림살이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해방구를 가지게 되지만
물론 점점 생활비는 떨어져가고, 세 여동생들은 건강상태가 악회되어 가는 것은 물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그저 집안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됩니다.
1988년 4월, 친구 두 명을 집으로 불러들인 장남은 자신이 먹으려고 남겨둔 컵라면이 사리진 것을 알고 동생들에게 캐물었지만 둘 째 여동생이 입가에 라면 부스러기를 묻히고도 시치미를 떼는 것에 화가 나서 큰 소리로 혼을 냅니다.
이에 둘 째 여동생은 곧바로 사과했지만, 당시 2살 이었던 막내 여동생이 울음을 터트리며 오줌을 싸자 끝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장남은 벌을 준다며 막내 여동생을 이불에 싸서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는 행동을 반복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같이 놀러온 소년들에게도 "너희도 해봐, 재미있어." 라고 권유했으나 거절. 결국 2살짜리 여동생이 버티기에는 지나친 충격이 지속적으로 가해지자 결국 두부외상(頭部外傷) 에 의해 사망하게 됩니다.
놀란 장남과 소년들이 마사지를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등 나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으나 이미 죽은 여동생을 살릴 수는 없었고, 약 일주일 정도 지나 부패하기 시작하자 여동생의 시체를 사이타마(埼玉) 현에 있는 히쯔지야마 공원(羊山公園) 근처 숲에 유기하게 됩니다.
이렇게 장남은 자기 손으로 2살배기 막내 여동생을 죽이고, 남은 두 여동생과 하루하루 굶주림을 견디며 생활하게 됩니다.
결국 처음에 이야기 한 것처럼 맨션 주인이 이 사실을 알게되어 바로 신고했고, 결국 무책임한 아이 어머니. 아니 범죄자는 뉴스를 보고서야 자기 집 아이들인 것을 알고 돌아갔다가 그 자리에서 경찰에게 체포 됩니다.
아이들이 출생신고도 안되어 있었던 탓에, 집에서 발견된 차남의 백골 시신과 숲에서 발견된 막내 여동생의 시신은 출생일과 사망일이 동시에 신고되는 웃지 못할 헤프닝도 있었습니다.
1988년 8월 10일, 도쿄 지검에서는 14살인 장남을 상해치사, 사체유기로 도쿄 가정법원에 송치되고,
단, "모친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며, 장남은 교육적처치가 필요" (母親がいれば起こりえなかった事件であり、長男は教育的措置が必要) 하다는 의견을 첨부하여 보호시설로 보내줄 것을 법원에 요청합니다. 일본의 검사들이 기소가 불가능할 것 같은 사건에는 그다지 세세한 신경을 쓰지 않는 관례를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한편 어머니 쪽은 "보호자 책임 유기법(保護者責任遺棄法)" 위반으로 송치되고, 결국 10월 26일, 어머니에 대해서는 "자기 아이를 양육하는 번거로움에서 도피하려한 무책임, 자기 위주의 극치인 범행, 3녀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わが子を養育する煩わしさから逃れようとした無責任、身勝手極まりない犯行、三女の死の遠因となった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
라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월을 선고합니다. 이런 중대한 사건의 원인이 된 범행의 결과 치고는 너무나도 가벼운 처벌이었죠. 그리고 장남은 모든 정황을 참작, 보호시설로 보내라는 법원의 명령이 떨어지며 일단락 됩니다.
결국 이 사건은 2004년에 코레에다 히로카즈 (是枝裕和) 감독의 손에 의해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 라는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참고로 이 감독이 배두나가 출연한 영화 "공기인형" 의 감독 입니다.
일부가 흔히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을 오사카 아동방치사건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이 스가모 사건이 실제 영화의 모티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사건과는 달리 비교적 따뜻한 분위기로 그려져 있는데, 감독의 성향에 따라 작품이 만들어 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이 영화는 57회 칸느 영화제에서 일본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최우수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훗날 어머니가 아이 둘을 방치해 죽이고 풍속업소에서 일하다가 이슈화된 오사카 아동유기사건에 비하면 다소 지명도가 낮은 사건이었지만, 아이들이 거의 1년 가까이 어른들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살아가게 방치하고 결국 한 아이의 생명까지 빼앗는 결과를 초래한 참혹한 결과를 보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란 사건은 아니죠.
사건의 <아사히 신문> 기사.
모친 (사건 발각 당시 40세)은 가와사키의 사립고교를 졸업 후 전문학교에 진학. 가수를 목표로 한 적도 있어, 실제로 레코드를 내기도 한다. 1968년 부터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같은 직장 남자동료와 동거를 시작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결혼은 하지 못한다. 아이를 출산하지만 입양 보낸다.
1973년 아다치구에서 같은 남성 사이에서 아이를 출산하지만 출생신고는 하지 않는다. 사건 발각 당시 장남인 이 아이는 14세 였고, 소년은 부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모친은 지금까지 부친이 다른 아이 5명을 낳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적어도 3사람과의 사이에 6명의 아이를 출산 했고, 장남 이외에는 모두 자택에서 혼자서 낳았다.
그 후 도내의 맨션을 전전해며 절도나 매춘을 해 경찰에 체포된 적도 있었다. 1981년에 장녀를 출산. 1984년에 9월에 차남을 출산하지만 2월 모유병을 입에 문 채로 질식사 한다.
모친은 처치가 곤란해 시신을 비닐에 악취제거제를 함께 싸서 벽장에 넣고 장남에게는 '친척 아저씨에게 맡겼다' 라고 말한다. 1985년 차녀를 출산하고 다음해인 1986년 삼녀를 출산 한다. 1987년 9월 무렵까지 오오츠카역 주변에 살고 있었지만 그 후 니시스가모로 이사하고 죽어 있던 차남의 시신은 비닐 봉투와 슈트케이스에 넣은 채로 옮긴다.
니시스가모의 맨션은 큰길에 접한 4층 건물로 살고 있던 곳은 2층 이었고 1층은 편의점이 있었다. 맨션의 주인에게 장남과 본인 두사람이 살고 있고, 장남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남편은 얼마전 사망했고 자신은 백화점에 근무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당시 주인은 그 밖에 다른 아이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
장남에게 지금은 학교에 갈 수 없지만, 언젠가는 갈 수 있도록 해준다라고 타이르고 시판중인 학습지를 사주었다. 장남은 발견당시 성은 한자로 쓸 수 있었지만, 이름은 히라가나로 밖에 쓸 수 없었다.
1987년 가을 부터 모친은 치바현 우라야스시의 냉동식품 판매업의 애인(56세)이 생겨 애인의 집에 틀어 박혀 맨션에 있는 아이들을 방치하기 시작한다. 장남은 모친이 일로 오사카에 출장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친은 가끔 2-3만엔 정도를 송금해 온 적이 있다. 가끔 정체 모를 남성이 방문하지만 애인인지 부친인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장남은 사라진 모친 대신 식사를 만들거나 기저귀를 바꾸는 등의 일을 하며 거의 매일 편의점에 방문해 크림빵이나 주먹밥, 아이스 크림등을 샀으며 편의점 점장은 한밤중이나 학교에 가 있는 시간대에 자주 보이는 장남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라고 말한다.
1988년 3월 말 부터 장남은 근처의 과자점에서 중학교 1학년인 두 사람을 알게 되고 이들은 맨션에 빈번히 출입하게 된다. 장남은 3개월 분의 집세를 지불했지만, 가스와 전기료를 체납하여 가스와 전기가 끊긴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4월 21일 낮. 맨션에 놀러와 있던 친구 2명 중 한명이 전날에 사둔 컵라면이 없어진 것을 눈치 채고 삼녀(2세)의 입가에 붙은 김을 보고 장남이 삼녀가 먹었다고 생각하고 때리기 시작한다.
장남의 친구 중 한명이 뼈를 부러트리겠다고 하자, 나머지 한명과 장남은 '맘대로 하라' 하고 티비를 봤다. 장남의 친구는 벽장의 윗칸에서 삼녀를 지속적으로 떨어 트렸고, 하다 보니 재미가 들려서 머리부터 떨어 트린다던지 일부러 떨어지는 곳에서 발을 뻗어서 배를 차 올리기도 하였다. 삼녀는 공처럼 채이자 울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재밌어서 재차 같은 행위를 반복하다가 그 수위가 점차 심해지기 시작한다.
문득 장남이 상황을 깨닫고 보니 방이 조용했고, 삼녀가 친구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친구 2명은 학대를 시작하고 장남이 그만두라 해서 멈추었다고 진술 했지만, 그 후 처음은 장남도 때렸다 라고 이야기해 장남도 세사람이 괴롭흰 사실을 인정한다. 발각 후 친구 두명 중 한명은 구호원에 송치, 다른 한명은 보호감찰로 끝나게 된다.
삼녀는 다음날 22일 오전 8시 경 사망하게 되고 삼녀가 사망하게된 치명상은 장남이 아니고 친구가 벽장에서 몇번이나 떨어뜨린 것에 의해서라고 장남의 변호사가 말한다.
26일 장남은 삼녀의 사체를 친구 2명과 함께 비닐 봉투에 싸고 보스턴백에 넣어, 전철을 타고 밤 11시경 치치부시 오미야공원 옆의 잡목림에 버린다. 사체를 버린 후 돌아간 전철이 없어 역에서 밤을 지샜다고 한다. 발견된 삼녀의 사체는 가디건과 스커트를 입은 모습이었다.
7월 17일 맨션의 주인이 엄마가 3명의 아이를 두고 돌아오지 않는다 라고 경찰에 제보하게 되고 집주인이 강제로 문을 열자 장녀와 차녀가 있었고, 바나나와 주먹밥을 내밀자 허겁지겁 먹었다. 다음날 경찰과 복지사무소의 직원이 집에 갔을 때 주방에서 장녀와 차녀가 모포에 휩싸여 자고 있었고 장남은 안쪽의 다다미에 이불을 깔아 자고 있었다.
여동생들은 특히나 쇠약해진 모습으로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정도로 심각한 영양실조 였다. 여동생들은 신주쿠의 아동상담센터에 맡겨지고, 장남은 하치오지 아동상담소에 수용되었다.
23일 애인의 집에 동거 중이던 모친은 티비 뉴스를 보고 사건을 알게 되어 자수 하려고 생각했다. 중학생 아이에게 모두를 돌보게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보호자유기, 치상의 혐의로 긴급체포 되었으며,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모친이 체포된 후 발견된 아이 이외에도 삼녀를 낳았다고 말했으며, 장남이 삼녀를 체벌 했다라고 진술해 상해치사와 사체유기 혐의로 체포 된다. 장남은 삼녀의 사망에 대해 진술하고 난 후 얼굴이 눈에 띄게 편안하고 온화해졌다고 한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라고 소장이 말했다.
8월10일 도쿄 지검은 장남을 상해치사, 사체유기죄로 도쿄 가정재판소에 송치. 동지검은 「모친만 있으면 일어날 수 없었던 사건이며 장남에게는 교육적 조치가 필요」하다며 소년원이 아니고 교호원에 보내는 것이 좋다는 이례적인 의견을 내었다. 이번은 장남이 호적도 없고, 완전히 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등 특수한 사정이 있어 아동복지시설의 교호원으로 교육을 받게 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범행에 참가한 소년 2명은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연령이라고 스가모경찰서는 보도했다. 10월26일 보호자 유기 , 치상의 죄에 거론된 모친에 대한 판결 공판이 있어 재판관은 징역3년, 집행 유예4년(구형 징역3년)의 유죄판결을 명했다.
판결 이유 중에서 집행 유예에 대해 「아이를 출생신고 하지않아, 학교에도 다닐 수 없게 하는 등 모친으로서의 자각이 없고 방치가 계속되면 아이의 생명이 없어지는 위험도 있었다. 부모의 책임을 방폐한 죄는 무겁지만, 자력 갱생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장녀와 차녀는 보호센터에서 양호시설에 보내졌지만, 둘은 후에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장남의 소식은 알 수 없다.